퇴사 후 아침은 맑을 줄 알았으나, 바로 실전이었다.
장희문 (영화 '트루먼 쇼' 오마주)
|
|
|
이진영: 바야흐로 퇴사의 계절입니다. 11월은 무릇 한 해를 정리하며 노동 이대로 괜찮은가 되돌아보게 되는 계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 또한 9월에서 11월 무렵 퇴사 욕구가 강하게 들던 때가 떠오르네요.
장희문: 회사와 퇴사, 하나만 다를 뿐인데 느낌은 참 다릅니다. 저는 회사라는 존재는 ‘돈’보다는 ‘배움’을 크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배울 수 있는 사람, 회사가 좋습니다. 직급은 상관없고요. 그럴 만한 곳이 아니라면 점점 마음이 멀어진다랄까요?
이진영: 저 또한 ‘자기발전’이나 ‘의미’ 가 가장 크게 차지합니다. 혹시 퇴사를 버티게 하는 원동력 같은 게 있으신가요? 전 상하관계보다는 수평적인 동료애에서 큰 힘을 얻습니다. 일이 고되어도 힘들다는 것을 다 함께 알고 있으니 회사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더라고요.
장희문: 제가 버티는 원동력은 하나입니다. 이번 달 월세. 힘들게 서울로 올라왔는데 다시 대구로 내려갈 수는 없거든요. 선택해서가 아니라, 환경에 의해서 떠밀리듯 고향에 내려가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그 생각을 하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게 되더라고요.
진영씨는 마지막 퇴사를 언제 하셨죠?
저는 아르바이트를 제외하면 딱 한 번의 퇴사를 경험했습니다. 2018년 7월에 결심하고, 12월 29일에 퇴사했습니다. 인생의 가치관이 그때나 지금이나 ‘돈’이 1순위가 아니고 자아실현 즉, ‘실력 상승’이 꿈입니다. 그래서 꿈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바로 결심했었습니다. 그렇다고 돈이 많은 집안이거나 그렇진 않고요.
이진영: 단 한 번 큰 결심을 하셨네요. 제 마지막 퇴사는 2022년 6월입니다. 23살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여러 곳을 탐험할 수 있었는데요. 어느 날 문득, 입사 후 매일 들던 내적 갈등이 일하는 내내 멈추지 않더라고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생계에 떠밀려서 일하고 있지 않은지, 앞으로도 흐르는 물에 떠다니는 부유물처럼 살 것인지 말이죠. 이와 같은 고민을 일한 내내 한 거 라면 앞으로도 멈추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도전이 더 늦어지기 전에 퇴사를 결심했습니다. 퇴사 후에도 대다수 인연을 유지하며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장희문: 진영씨의 첫 출근날과 기억에 남는 몇 장면이 떠오르네요. 경상도 사람은 많았지만, 동향 사람은 흔치 않았거든요. 매일을 내적 갈등 속에 사시면서 “언젠가…”라는 말을 말버릇처럼 하셨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진영: 저는 언제 모를 퇴사를 맞이하기 위해 항상 자리를 깨끗이 유지합니다. 집으로 돌아가게 될 때, 마치 헤어진 연인과의 미련을 정리하는 것 처럼 짐을 왕창 들고 가고 싶진 않거든요. 만족스러운 방법입니다.
|
|
|
장희문: 봤던 분 중에 가장 빠르게 퇴사한 사람이 있나요? “이렇게 빨리?” 같은 느낌으로요.
이진영: 입사 첫날 자기소개 시간에 제가 사진 전공을 했다고 하니, 자기도 프리랜서 활동을 하신다고 반가움을 표하신 분이 계셨는데 그날 오후에 나가셨다고 하더라고요. 입사와 동시에 누군가의 퇴사를 발견해서 놀라웠고, 두 번째는 한참 후임이 들어올 때였는데 오전에 인수인계하고 나니 점심시간에 나가신 분 기억나네요. 가장 빠른 퇴삽니다.
장희문: 저는 입사 첫날, 2명의 동기가 있었습니다. 그중 한 분이 근처 대학 출신에 회사 가까이 거주하시던 분이셨는데, 다음 날 출근할 때 보니 제가 퇴근할 때 앉아있던 그 자리에 계속 앉아 계시더라고요. 밤을 새우신 거죠. 그 모습이 마지막이네요. 통성명도 하지 못하고 떠나보냈습니다.
이진영: 동료가 떠나는 헛헛한 마음들이 어느 정도 지나면 이젠 첫인상만 봐도 머리 위에 퇴사 D-00일이라고 자동으로 떠오르지 않습니까? 맞췄던 적도 있고 예상외로 오랫동안 버티던 분들도 기억납니다. 퇴사 기운이 감지되면 그분들의 탈출로 인해 나에게 닥칠 일 들을 미리 대비합니다. 퇴사 기운, 어떤 느낌인지 아시나요?
장희문: 저는 팀원끼리 그런 이야기를 자주 해서 퇴사 기운을 100% 느끼지는 못했습니다만, 앞에 말씀하신 머리 위에 뜬 날짜는 공감이 됩니다. 한 달 안에 퇴사하는 분들의 특징은 “회사에 뼈를 묻겠다.”, “열심히 하겠다.” 등의 포부를 밝히는 것이더라고요. 그와 반대로 몇 달 다니던 사람들이 “못 해먹겠다.”, “그만둘래” 등을 말씀하시면서 오래 다니시더라고요.
이진영: 저는 후자에 속해서 뜨끔하네요. 그 마음을 한번 대변해 보자면 자기 암시를 계속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버틸 수 있거든요. 열정적인 분들은 그 열정이 여러 차례 꺾이는 순간 결심하시는 것 같습니다.
퇴사 직전 바이브를 떠올려보면 업무에 치명상을 입는 사건이 하나씩 존재하더라고요. 마치 그분이 타깃이라도 된 듯 온갖 우환들이 태풍처럼 휘몰아치고 어느샌가 숙연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느낌이옵니다. 아, 곧 말하겠구나..! 이외에는 대부분 똑똑하고 영리하게 이직을 준비하셔서 재빨리 떠나시더군요. 때로는 빠른 판단이 나쁜 것만은 아니구나 라고 느낍니다.
장희문: 어떻게 보면 회사가 맞지 않지만, 열정으로 버티던 사람의 열정이 꺾이는 순간, 방아쇠를 당긴 총처럼 ‘탕’하고 발사되는 것 같습니다. 이직 이야기가 나오니 떠오르네요. 대학 시절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입사와 동시에 이직 준비를 해라” 이 말이 그때는 웃겼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저는 준비 없이 프리랜서라는 맨땅에 이직을 했기때문이죠. |
|
|
퇴사 또는 이직을 바라는 누군가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이진영 (일러스트, 사진 Kyoto Japan, proimage100) |
|
|
이진영: 누군가에게 우리는 어떤 빌런으로 남아 있을까요. 감사히도 천사로 남겨진 경우도 있겠죠? 제가 만난 빌런과 천사들을 떠올려봅니다.
장희문: 회사를 한 곳에서만 다녔지만, 마음이 잘 맞던 직원과 빌런 클라이언트가 있었습니다. 제 디자인 스타일을 존중해 준 좋은 팀장도 있었습니다. 또, 제가 잘 모르는 부분을 채워주던 신입도 있었고요. |
|
|
진상 클라이언트 형
장희문: 평일 동안 피드백이 오지 않았다가, 쉬는 일요일 점심에 수정해야 한다며 연락해 오던 내부 실무자와 클라이언트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클라이언트가 참 미웠지만 지금 생각 해보면 중간에서 소통하던 실무자의 역할에 의구심이 듭니다. 충분히 월요일에 해도 되는 일인데 말이죠.
이진영: 중간 소통자 역할은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저도 샌드위치처럼 중간에 껴 있던 적이 있는데 빨리 자료를 보내주셔야 당장 진행이 가능한데 당일 리허설 30분 전에 파일 주신 분이 기억에 남네요. 분초를 다투는 시각에도 연락드릴 때마다 정중히 사과하시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낙하산 형
이진영: 평화롭던 회사 생활에 휴가를 다녀온 사이 입구에 새 주소지와 함께 이곳으로 오라는 메모만 덜렁 남겨져 있어 갔더니, 옮겨진 사무실과 리더의 여자친구가 짠~하고 상사로 등장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고 내내 저를 앞뒤로 비하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똥이 더러워 퇴사했고 그들은 헤어졌다고 합니다. 지금은 직장 내 괴롭힘으로 징계를 받겠죠?
장희문: 낙하산의 경우를 실제로 접하지는 못했으나, 공/사를 구별하지 못한 끼리끼리의 결과네요. 누군가를 비하함으로 직장 내 괴롭힘을 시전하신 것을 보아 제가 다니던 회사의 대표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려놓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기뿐 아니라 리더까지 욕보이는 일을 스스로 선택하다니요.
TMI 형
이진영: 회사의 두 가지 귀가 있죠. ‘듣는 귀’와 ‘보는 귀’ 일하러 온 곳에서는 사내의 화두나 여러 송사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제 신념인데요. 안타깝게도 피할 수 없는 인연을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루의 반을 함께 보내는 시간에서 그분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을 피할 수 없었는데요. 정말 사사로운 일들이 그분을 통하면 사건이 되어서 나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합니다. 자신이 맡은 일 대부분을 아랫사람에게 위임하는 너그러움까지.
그분의 위압적인 말투와 업무지시 아래 이미 퇴사를 결심한 아랫사람은 여럿인데요. 나가는 사람을 막지도 못하고 윗선에 말하지도 못했던 중간에서 아주 난처한 시간을 보낸 것이 지금 떠올려봐도 개탄스럽네요. 잘못이 지적돼도 본인만의 신념으로 미화해버리니 일 못하고 성격 나쁘고 눈치도 없는 유형입니다. 입소문이 나서 사내는 물론이거니와 이직도 쉽지 않은 길을 걷고 있다는 후문이 있네요.
장희문: 정말 안타까운 후문입니다. 흔히 회사하면 떠오르는 것이 사내 연애인데 “복사기도 아는”이라는 말이 붙죠. 사람들이 사내 연애라는 단어에만 초점을 맞췄지, 복사기는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사람이 아닌 물건도 알 정도니 얼마나 말조심해야 하는지 알 수 있는 옛 선배님들의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잠깐 아르바이트할 때, 술 강요를 심하게 하던 곳이 있었습니다. 회식 1차에서 “장 대리는 술 한 잔 안 해?” “네”, 이렇게 치열한 공방 3차전이 오가고, 2차 통닭집에서 “맥주도 한 잔 안 해?” “네” “정말 안 하네 쩝” 이러시더라고요. 아마 말씀하셨던 에피소드의 그 분이 나중에 이렇게 되실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다른 TMI로 직무 외 궂은 일을 모두 제가 떠맡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름철 최상의 에어컨 위치, 에어컨이 시원하지 않은 이유, 대변기가 막히는 이유, 난방기가 작동하지 않는 이유, 두꺼비집이 내려갔을 때 한전에서 알려주는 방법 등 이런 걸 디자인 회사에서 디자이너가 알아야 하는지 참 의문이 들었습니다. 첫 회사이고 뭐든지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에 모든 것을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납니다. 디자인 시간까지 줄여가면서요. 그때부터였나요? 손이 빨라졌습니다.
이진영: 이유를 잘 찾아내셔서 그런 것 아닐까요? 여기저기서 울리던 “희문아!”와 희문님을 지키고 싶어 매번 흔들리던 팀장님의 동공이 떠오릅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형
이진영: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동료와의 합은 전쟁터에서 전우애와 같은 관계로 결속시켜주죠. 내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바라보는 업무 시각에서 오는 배움들. 사고 친 순간에 해결사로 나타나는 기가 막힌 타이밍. 가파른 회사 생활 동안 든든히 의지한 기억이 납니다. 생판 모르는 사람과 일이라는 매개로 시너지가 맞을 때 느끼는 희열이 있습니다.
나를 지켜준 천사 형
장희문: 좋은 동료의 기준은 공/사로 나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연차일 때 클라이언트들의 무리한 요구와 의미 없는 시간 낭비를 팀장님이 모두 막아줬습니다. 팀장님이 오신 이후로, 야근이 꽤 많이 줄었습니다. “쓸데없는 야근을 지양하자”라는 그의 부임 후 첫 마디를 지킨 것이죠. 하지만 새로운 지평선을 연 뒤 고위 실무자들과 갈등을 겪으셨던 것이 생각나네요.
이진영: 상사 혹은 사수가 되어 내가 책임질 사람들이 여럿 늘어나면 그야말로 외줄타기인 것 같습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 모두에게 신뢰감을 잃지 말아야 하니 말입니다.
사적으로도 잘 챙겨준 씀씀이가 좋은 형
장희문: 생일이나 야근 등 또는 디자인으로 고민이 깊어지는 날에는 꼭 좋은 음식을 대접해 주셨습니다. 상경한 저를 외롭지 않게 해주는 것이 그의 목표였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희 팀원들이 퇴사할 때면 사비를 이용하여 티셔츠를 사주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돈을 떠나 선물에 마음이 담겼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어느 날 팀원 한 명이 퇴사하려고 했는데 함께 갔다가 덩달아 티셔츠 하나씩 생겼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분은 부하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료’로 보는구나가 느껴졌습니다. 추가로 제가 퇴사할 때는 평소 좋아하던 작가의 작품 금액이 상당했지만, 서슴없이 사주셨고 스스로 많이 기뻐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날짜도 정확히 기억이 나네요. 18년 11월 신촌 KT 화재가 난 날이었죠.
이진영: 동료든 상사든 사적으로 연이 이어질 때 보람되고 좋습니다. 저는 근무할 때 저 말고도 여러 동료를 모아 밥과 술을 매번 사주시던 분이 생각나는데요. 그 관계는 결혼식 초대로 막을 내렸습니다. 그것을 향한 긴 여정이었을까요
|
|
|
일 잘하고 성격 더러운 상사
vs 일 못하고 성격 좋은 상사 |
일은 잘하는데 꾀부리는 후임
vs 일 머리 없는데 정직한 후임 |
|
|
이진영: 좋은 상사는 어떤 의미일까요?
장희문: 제 기준에서 좋은 상사는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제가 모르는 것을 알려주고, 건설적인 것을 추구하는 분이라면 좋은 상사가 아닐까요? 그렇다고 매사에 피해 주는 스트레스를 부린다면 조금 난감하긴 하겠죠. 그렇게 본다면 저는 좋지 않은 상사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매사에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배울 점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진영: 어쩌면 좋은 상사는 ‘나와 호흡이 잘 맞는가?’도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 저는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 분이 좋습니다. 서로 상생하는 관계에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보다는 감하나 주면 배로 트레이드해 주는 유형이요. 욕심을 한 스푼 더하면 최소한의 직업윤리나 책임감이 느껴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네요.
그럼, 일 잘하고 성격 더러운 상사 vs 일 못하고 성격 좋은 상사 어느 쪽이신가요?
장희문: 참 제가 어려워하는 밸런스 게임이네요. 저는 전자 선택하겠습니다. 일 잘하는 것을 배우는 게 훨씬 좋을 것 같습니다. 회사라는 곳은 하나의 전투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터에서 일을 못 하는 것은 총알 없는 총을 들고 다니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총이라도 쏠 줄 알아야 전투던 전쟁이던 이길 수 있으니까요. 진영씨는 어떤 쪽을 택하시나요?
이진영: 저는 후자를 택하겠습니다. 이 질문은 어느 것이 참을만한가, 어느 것이 덜 괴로운가가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좋은 리더는 적당한 카리스마와 포용력에서 탄생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일은 어차피 제가 해야 하니 포용력이라도 좋으면 참고서 할 것 같습니다. 전투에서 아군이 되어줄 사람이 적군의 위치에 선다면 못 견딜 것 같네요.
|
장희문: 반대로 누군가는 후임을 받을 시기가 되기도 할 텐데요. 이번에는 제가 질문을 드려보지요.
어느 후임과 일할 것인가? 일은 잘하는데 꾀부리는 후임 vs 일머리가 없는데 정직한 후임
이진영: 참으로 어려운 질문을 반문하시네요. 저는 후자로 하겠습니다. 사수 역할을 이르게 하다 보니 나이, 성격, 성별, 다양한 후임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요. 저보다 경험이 많고 나이가 많다고 해서 불성실한 분들을 못 봤고, 신입이라고 해서 마냥 성실한 분들을 못 본 것 같습니다. 그런 부분을 고려하면 일머리가 없어도 정직하고 성실한 후임이 좋습니다. 물론 더블 체크하는 시간이 고통스럽겠지만 제게도 처음은 있었으니까요. 특히 인수인계할 때 그 많은 내용을 메모 없이 그냥 듣는 분 치고 오래 버티거나 성실하신 분들을 잘 보지 못한 것 같네요.
장희문: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시군요. 저는 ‘일’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성실’, ‘정직’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습니다. 일을 아무리 잘하더라도 ‘정직’하지 않고 ‘꾀’를 부린다면, 저에게는 탈락입니다.
그렇다고 후자가 100%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일머리라는 것은 센스인데요. 1을 알려줬을 때 0.8만 해도 저는 만족합니다. 여기서 0.2~0.5를 한다면 골치가 몹시 아플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제 성격상 1-100을 모두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전자보다는 스트레스가 덜한 것 같습니다. 전자는 같이 일하기 싫고, 후자는 “사람은 착하잖아”라는 저 스스로에게 하는 위로의 한 마디가 있거든요…
메모와 성실함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제 머리(기억력)를 믿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메모하는 편입니다. 그것이 빛난 시기는 군대입니다. 행정병이라 사무실 기초 예절, 자대뿐 아니라 옆 부대의 기수까지, 각 캐비닛에 들어있는 용품을 도식화해 메모장에 기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졌습니다. 사람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간과하고 자신을 믿는 분들을 보면 진영씨 말씀대로 조만간입니다.
후임을 많이 받아본 적은 없으나, 가장 큰 고민은 가치관입니다. 일에 임하는 자세와 가치관이 서로 다를 때, 또는 초년생 후임의 경우 가치관이 성립되지 않았을 때 제가 감히 “이 사람에게 일에 임하는 가치관을 부여해도 되는가?”라는 고민에 빠집니다. 저는 저만의 프로세스로 일하는데 그 프로세스를 다른 이에게 강요하는 것은 폭력적인 행위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최대한 여러 가지 방향을 제시해 주려고 하는 편입니다. “저라면 이러이러한 이유로 이렇게 했을 것인데, 다른 방법은 이런 것도 있지 않을까 싶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처럼 말이죠.
이진영: 말씀하신 가치관의 차이일까요?
지금과는 다른 사회 경험을 해왔던 사수로서 이제는 후임에게 더욱 조심하게 되는 경향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다신 없을 기회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단지 돈 버는 행위에 불과하다면 마냥 곧은 태도나 자세만을 요구하기보다는 오픈 마인드로 일과 프로세스에 대한 선택지를 늘려가게 해주는 방법이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내가 여태껏 고수해온 것이 편하다고 해서 이것이 정답은 아니거든요.
얼마 전에 KBS 열린 채널에 <꼰대라이트>라는 짧은 프로그램을 봤거든요. 10대에서 50대까지 각 1명씩 모여 업무에 임하는 자세나 문제시되던 대화법들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결론은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대화법으로 정리가 되는데요.
불평보다는 바람을, 지시보다는 권유의 형태로 대화법을 바꾸어본다면 서로에게 조금은 더 평화로운 회사 생활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
|
이진영: 결론으로 저희는 퇴사했고, 또 이직하고 순환하는 흐름을 반복하게 될 것 같은데요. 퇴사 후 장단점 있으신가요?
장희문: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듯, 우리가 싫어하는 그들이 언제 나갈지는 모르니 제가 먼저 나오고 나서 일단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가장 좋았던 점은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빌런들을 보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물론 프리랜서가 되고 나서 이 장점들이 퇴색되었지만요.
이진영: 저는 어떠한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감이 사라져서 좋습니다. 일하는 행위가 가져다주는 개인의 보람도 있겠지만 제 업무 잠재력과 월급을 트레이드하는 것이다 보니 정기적인 평가와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기더라고요.
또 흔히 말하는 사회생활, 동료와 클라이언트 상사 등에게 보이고 들리는 시선과 평판들 속에서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어 쉴 새 없이 굴리던 컴퓨터가 갑자기 멈춰버리니 적막한 느낌도 들고요. 사람과 사람 사이 오가는 에너지가 줄어서 따분하기도 반면에 편안하기도 한 어떤 양가적인 마음들이 공존합니다. |
|
|
장희문: 많은 회사에 다니진 않았지만, 점심시간이 정확하지 않은 회사는 피해야 합니다. ‘12시부터 13시까지 점심’ 같은 이야기 없이 상사들이 배고플 때 밥 먹고, 식사 후 바로 오후 근무에 돌입하는 회사가 있었는데요. 워라밸이 깨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알 수 없겠지만 가족이 함께 일하는 회사는 불편합니다. 식사 시간에도 야단을 치고, 눈치를 주더라고요. 회사에서는 ‘일’만 했으면 하거든요.
이진영: 저 또한 사적인 관계가 도드라지는 회사는 피했으면 합니다. 일로 만난 사이로 시작하는 출발점이 다르다는 소외감과 함께 신뢰감이 떨어질 것 같습니다. 언행을 조심한다면 괜찮지만 말이죠.
또 계약 조건이 법적으로 문제시되거나 불명확한 곳은 피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라는 막연한 약속 같은 거요. 그런 약속하는 분치고 기억하고 제때 얘기하는 사람 못 봤습니다. 어느 회사건 처음부터 다 갖춰져 있는 곳은 중견기업 이상이 아니고서야 어렵습니다. 다만 법에 따른 조건은 근로자에게 할 수 있는 약속과 책임 같은 의무라 처음부터 어긋나게 시작한다면 일하는 내내 나와 회사를 의심하게 될 겁니다.
마지막으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직업의식을 느낄 수 있도록 명확한 직무가 제시되면 좋겠습니다. 타인에게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조차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면 ‘나’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만 늘어날 것 같네요.
장희문: 혹시나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입사를 앞두고 계신다면 진영씨 말씀이 참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회사라는 곳은 사람 때문에 지치기도 하고, 사람 때문에 힘을 얻기도 하는 좁은 공간이라고 생각됩니다. 인연이 되기도 하며 악연이 되기도 하지요. 프리랜서가 된 지금 생각해 보면 회사라는 곳이 주는 경험치와 퇴사가 주는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경험치를 위해 다시 회사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아직 추호도 없지만요.
이진영: 회사 생활이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크나큰 영향을 주는 곳이라는 것은 외면할 수 없는데요. 스치며 만난 인연이더라도 인생 전반에 여러 작용을 하기도 하니까요. 주체적으로 나만의 무언가를 이끌어가고 싶은 분들이더라도 한 번쯤은 사회성을 위해 경험해보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전 딱 중간쯤의 사람인 것 같거든요. 그래서 때로는 어디에 어울리는 사람인가? 하고 흔들릴 때도 있지만, 회사 생활로부터 경험한 것들이 나의 내면에 큰 자산이 된 것은 분명합니다. 개떡 같아도 한 번은 다녀보세요. |
|
|
|